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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색5

선을 긋는다는 것 선을 긋는다는 것— 창작이 마음을 정리하는 방식에 대하여1. 아무 의미 없이 긋기 시작한 선 하나어느 날 저녁, 뭘 해도 마음이 어지러운 날이었다. 말을 해도, 글을 써도 정리가 안 되던 그때, 나는 갑자기 펜을 잡고 종이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의도도 없고, 형태도 없이 그냥 긋는 선. 길고 짧고 굵고 가늘게,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는 손끝.처음엔 낙서 같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손이 마음보다 먼저 움직이고 있다는 걸 느꼈다. 뇌가 아닌, 감정이 직접 펜을 쥐고 있는 것 같은 느낌.그리고 나는 알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그은 선이, 내 감정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창작은 때때로 ‘하려는’ 것이 아니라, ‘흘러나오는’ 것이다. 선 하나가 감정을 설명하진 못해도, 적어도 감정을 흘려보내는.. 2025. 7. 2.
거울 속의 나와 낯선 초상화 거울 속의 나와 낯선 초상화— 예술 감상은 결국 나를 비추는 일이다1. 자화상 앞에서 나를 마주하다가끔 미술관에 가면, 사람 얼굴이 그려진 그림 앞에서 발걸음이 멈춘다. 특히 자화상. 고흐의 휘청이는 붓질이나 프리다 칼로의 뚫어지게 응시하는 눈빛, 렘브란트의 무채색 그림자 속 눈 밑 주름들. 낯선 얼굴인데 이상하게 익숙하다. 익숙한데 불편하다. 왜일까.나는 그 앞에서 내 얼굴을 본다. 내가 본 적 없는 얼굴인데, 내 표정 같다. 어떤 날은 씩 웃는 자화상이 내 감정과 멀게 느껴지고, 어떤 날은 괴롭고 지친 얼굴이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눈을 피하고 싶어진다.예술은 타인의 표현물이지만, 감상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이다. 그래서 감상은 늘 ‘개인적’이다. 그림을 보는 것은 누군가의 시선을 빌려 나를 비추는.. 2025. 7. 2.
노랑이 나를 건드릴 때 노랑이 나를 건드릴 때— 감정과 색채, 그리고 나의 일상 감상법1. 노란색 앞에 서면 이유 없이 마음이 흔들린다한 번쯤은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갤러리나 카페 벽에 걸린 작은 그림 하나에 발걸음을 멈추게 된 적. 나는 그날, 아무 생각 없이 앉은 카페 구석에서 노란색 해바라기 그림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특별히 잘 그린 것도 아니고, 화려한 기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그 노란색이 나를 흔들었다.나는 생각했다. "왜 하필 노란색일까?"색은 단순한 시각적 요소가 아니라 감정의 기호다. 인지심리학적으로 색은 우리 뇌의 정서적 반응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노랑은 흔히 ‘밝음’, ‘생기’, ‘에너지’를 상징하지만, 동시에 ‘불안정’, ‘애잔함’의 기운도 갖고 있다. 우리는 때때로 .. 2025. 7. 2.
김환기와 마크 로스코: 색면 회화 속 침묵과 감정의 대화 김환기와 마크 로스코: 색면 회화 속 침묵과 감정의 대화추상미술의 세계에서 '색'은 단순한 시각적 요소가 아니다.그것은 감정, 사유, 심지어 영혼과 닿는 매개체다.이런 ‘색의 철학’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두 작가, 김환기와 마크 로스코는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활동했지만,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지점에 도달했다.이 글에서는 그들이 어떻게 색을 다루었는지, 그 침묵 속 감정은 어떻게 다르게 울렸는지를 살펴본다. 1. 색을 통한 감정의 언어 김환기의 작품을 처음 보는 이들은 종종 그 '점'에 압도된다.하지만 그 점들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감정을 드러내는 언어다.그는 한 점 한 점에 자신의 숨결을 담았고, 그렇게 이루어진 전체 화면은 하나의 서정적인 우주처럼 다가온다.반면 로스코의 색면은 훨씬 조용하고 무겁.. 2025. 6. 23.
색채로 쓰는 시, 김환기의 블루 철학 색채로 쓰는 시, 김환기의 블루 철학1. 김환기의 푸른 시절 – 색채에 눈뜨다김환기의 작품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색은 단연 ‘푸른색’이다. 그리고 그 푸름은 단순한 색 이상이다. 그것은 유년기 안좌도의 바다와 하늘, 젊은 시절 외로운 유학 시절의 감정, 뉴욕의 밤하늘을 닮은 기억들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다.그의 푸름은 차갑거나 멀지 않다. 오히려 따뜻하고 내면적이다. 그는 종종 ‘파랑은 내 마음의 고향’이라고 말했다. 이는 단지 풍경의 묘사가 아닌, 그의 정서적 기반이 색으로 표현된 것이다. 김환기의 블루는 기억과 사색, 고요함과 울림의 시각적 언어다. 2. 점으로 그린 우주, 색으로 읊는 시김환기의 대표작인 점화(點畵) 시리즈를 보면, 캔버스 위에 수천 수만 개의 점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그리고 그.. 2025. 6.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