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와 마크 로스코: 색면 회화 속 침묵과 감정의 대화
추상미술의 세계에서 '색'은 단순한 시각적 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 사유, 심지어 영혼과 닿는 매개체다.
이런 ‘색의 철학’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두 작가, 김환기와 마크 로스코는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활동했지만,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지점에 도달했다.
이 글에서는 그들이 어떻게 색을 다루었는지, 그 침묵 속 감정은 어떻게 다르게 울렸는지를 살펴본다.
1. 색을 통한 감정의 언어
김환기의 작품을 처음 보는 이들은 종종 그 '점'에 압도된다.
하지만 그 점들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감정을 드러내는 언어다.
그는 한 점 한 점에 자신의 숨결을 담았고, 그렇게 이루어진 전체 화면은 하나의 서정적인 우주처럼 다가온다.
반면 로스코의 색면은 훨씬 조용하고 무겁다.
그는 강렬한 붉은색, 자주색, 검은색을 사용하며, 색이 겹쳐진 면 위에서 침묵과 명상의 공간을 만든다.
로스코는 자신의 그림 앞에서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원했고, 실제로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났다.
2. 구조 없는 구조: 화면 속의 질서
김환기의 후기 점화 작품은 얼핏 보면 무질서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점 사이의 간격과 밀도, 색의 톤 차이까지 치밀하게 조율되어 있다.
이는 음악의 리듬과도 같고, 자연의 질서와도 같다.
로스코는 화면에 두세 개의 색면을 올려놓되, 그 경계를 일부러 모호하게 처리한다.
테두리를 흐리게 하고, 색면을 겹치면서 ‘깊이’를 만들어낸다.
이 깊이는 시선이 멈추지 않고, 계속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드는 구조 없는 구조다.
3. 침묵과 고요의 미학
김환기의 점들은 떠들지 않는다.
그들은 화면 위에서 조용히 빛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자기 내면과 대면하게 만든다.
그의 작품은 ‘말이 없는 시’와 같다.
로스코는 더 깊은 침묵 속에 있다.
그의 그림은 말 그대로 기도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미술관이 아니라, 교회나 납골당처럼 영적인 공간에 어울리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그는 휴스턴의 로스코 채플이라는 명상 공간도 남겼다.
4. 현대미술에서의 공감력
김환기의 미학은 한국적인 정서—자연과 그리움, 색채의 서정성—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성을 품고 있다.
그의 작품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다.
로스코 역시 특정한 서사를 지우고, 오직 색만으로 감정을 전달하려 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국적과 배경을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다.
그림 앞에서 침묵하게 만들고, 자신의 고통이나 공허함을 마주하게 한다.
김환기와 로스코는 전혀 다른 시공간에 살았지만, 결국 ‘색’이라는 가장 순수한 언어로 관객과 소통했다.
하나는 바다와 별을 떠올리게 하는 점의 시인, 다른 하나는 심연의 어둠을 직시하게 하는 색의 철학자.
둘 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큰 말을 한 예술가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침묵 속에서 오히려 가장 깊은 감정을 느낀다.
그들의 색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