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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색

선을 긋는다는 것

by 얀쇼밍키 2025. 7. 2.

선을 긋는다는 것

— 창작이 마음을 정리하는 방식에 대하여

1. 아무 의미 없이 긋기 시작한 선 하나

어느 날 저녁, 뭘 해도 마음이 어지러운 날이었다. 말을 해도, 글을 써도 정리가 안 되던 그때, 나는 갑자기 펜을 잡고 종이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의도도 없고, 형태도 없이 그냥 긋는 선. 길고 짧고 굵고 가늘게,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는 손끝.

처음엔 낙서 같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손이 마음보다 먼저 움직이고 있다는 걸 느꼈다. 뇌가 아닌, 감정이 직접 펜을 쥐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나는 알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그은 선이, 내 감정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

창작은 때때로 ‘하려는’ 것이 아니라, ‘흘러나오는’ 것이다. 선 하나가 감정을 설명하진 못해도, 적어도 감정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될 수 있다.

2. 선은 말을 하지 않지만, 감정을 기록한다

심리 미술 치료에서는 ‘선 그리기’가 자주 등장한다. 왜냐하면 선은 가장 본능적인 표현 수단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도, 말보다 먼저 선을 긋는다. 그리고 그 선은 단순한 선이 아니라 감정의 흔적이다.

불안한 사람은 떨리는 선을 긋고, 지친 사람은 짧고 무력한 선을 남긴다. 반대로 몰입한 상태에서는 자연스럽고 유려한 곡선이 따라 나온다. 마치 몸 안의 감정이 손을 타고 나오는 것처럼.

내가 무심코 그은 선들을 나중에 다시 보면, 그날의 감정이 느껴진다. "아, 저땐 마음이 꽤 무거웠구나" "이건 뭔가를 정리하고 싶어 했네" 그건 텍스트로 쓰인 일기보다 더 솔직한 감정 기록일 수도 있다.

선을 그으며 느끼는 안정감은 감정을 언어로 바꾸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에서 오는 것 같다. 그저 손을 움직이기만 해도, 나를 돌보는 일이 되는 것. 그래서 선은, 내가 나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조용한 언어가 된다.

3. 선을 긋는 습관, 감정의 흔적을 남기다

나는 요즘 하루에 한 번씩 선을 긋는다. 정해진 도형도 없고, 멋진 구도도 없다. 그냥 빈 종이와 펜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그날의 선 하나를 남긴다. 기분이 좋은 날은 곡선이 많고, 집중한 날은 직선이 정렬되어 있고, 지친 날은 선도 지쳐 있다.

이 습관은 창작을 위한 연습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위한 기록이다. 매일 한 줄씩 그어가는 마음의 기록. 이건 남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좋다. 오히려 그래서 더 진실하다.

사람들은 종종 “그림 잘 그리는 사람만 드로잉하는 거 아니냐”고 묻는다. 나는 그럴 때마다 말한다.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그으면 돼요.

선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표현 방식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표현할 감정을 갖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