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의 나와 낯선 초상화
— 예술 감상은 결국 나를 비추는 일이다
1. 자화상 앞에서 나를 마주하다
가끔 미술관에 가면, 사람 얼굴이 그려진 그림 앞에서 발걸음이 멈춘다. 특히 자화상. 고흐의 휘청이는 붓질이나 프리다 칼로의 뚫어지게 응시하는 눈빛, 렘브란트의 무채색 그림자 속 눈 밑 주름들. 낯선 얼굴인데 이상하게 익숙하다. 익숙한데 불편하다. 왜일까.
나는 그 앞에서 내 얼굴을 본다. 내가 본 적 없는 얼굴인데, 내 표정 같다. 어떤 날은 씩 웃는 자화상이 내 감정과 멀게 느껴지고, 어떤 날은 괴롭고 지친 얼굴이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눈을 피하고 싶어진다.
예술은 타인의 표현물이지만, 감상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이다. 그래서 감상은 늘 ‘개인적’이다. 그림을 보는 것은 누군가의 시선을 빌려 나를 비추는 일이다. 마치 낯선 거울 앞에 선 듯한.
2. 감상자는 언제나 감정을 투사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감상을 "투사적 동일시"라 부른다. 내가 그림에 내 감정을 던지고, 그 감정을 다시 그림을 통해 나 자신에게 되돌려 받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때로 불편함을 느낀다. 그림이 주는 불편함이 아니라, 내 감정이 낯설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익숙한 전시회에 갔는데 이상하게 그림들이 하나같이 차갑고 멀게 느껴졌다. 몇 달 전만 해도 ‘깊고 따뜻하다’고 느꼈던 그림들인데. 똑같은 작품인데 왜 다른 느낌일까? 그 순간 깨달았다. 그림이 달라진 게 아니라, 내가 달라졌다는 것.
이게 바로 예술 감상의 핵심이다. 우리는 고정된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필터를 끼고 본다. 그래서 예술은 늘 새롭고, 감상은 반복될 수 있다.
그림은 변하지 않지만, 나는 매일 변하니까.
3. 감상의 끝에는 결국 ‘나’가 있다
누군가는 말한다. “예술을 이해할 수 없어요.” 그 말에 나는 자주 웃는다. 사실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해’가 아니라 ‘느낌’이다. 작품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도, 뭔가 울컥하거나, 이유 없이 불편하거나, 반대로 마음이 편안해진다면 그건 충분히 훌륭한 감상이다.
그림을 보면서 울었다고 말하면, 누군가는 예민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감정을 믿는다. 누군가의 표현이, 나의 내면에 닿았다는 사실. 그걸 믿고 싶은 것이다. 감상은 결국, 내가 나를 만나는 방식이기도 하니까.
예술은 작가의 것이지만, 감상은 나의 것이다. 그리고 그 감상은 나를 더 잘 알게 하는 은밀하고 조용한 방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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